Light Drawings 가벼운 그림

텅 빈 마음으로

Anan아난 2024. 6. 19. 20:00

 
 
 
 

 
 
 
 
 
 
 
창고 정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퍽 작은 면적의 창고가 발 디딜 곳이 없이 꽉 차 있었다.
나의 옛 그림들과 책들로.
 
 
볼 때마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끌어 안고 살았다. 창고를 정리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몇번이고 정리해야지, 버려야지 생각을 했지만, 막상 옛 그림들과 물건들을 보면 ‘이것만은 절대 안돼…’ 하며 버리려던 물건들을 몇번이고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다시 한번 큰 마음을 먹었다. 내 작품 세계가 계속 답보 상태인 것이 느껴졌고, 더 나아가 삶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과거의 방식들이 여전히 나를 붙잡아두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창고에 있던 오래된 그림과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고 다시 대면하는 순간, 옛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듯한 알싸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어떻게 나랑 헤어질 수 있니?’ 라는 말을 던지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움직였다.
 
 
이 헤어짐이 너무 아쉽지는 않도록 옛 그림들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캔버스 틀에 고정되어 있던 그림들을  해체시켰다. 처음엔 역시나 망설여지는 감정이 크게 올라왔으나,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물론 버리기로 한 모든 작품을 버리는데 성공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몇개는 결국 버리지 못하고 창고에 다시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과감하게 버린 그림들이 (이것만은 절대 안돼 하던…) 많았다.
 
 
하나 하나 정말 공을 들여서 만든 그림들이기에 버리기 왜 아깝지 않았겠느냐만, 그새 시간이 많이 흘렀고, 벽에 다시 걸리거나 전시될 확률이 적은 작품들임이 분명했다. 사람이 나이가 먹고 일정 수명이 있듯 그림도 그렇다. 시간이 갈수록 처음 탄생했을때 만큼의 쨍한 빛깔과 생명력이 희미해진다. 저들의 남은 수명은 결국 창고 안에 앉아 있다가 누군가의 손에 버려지는 것일터. 그 전에 내가 정리할 수 있을 때, 사진도 찍고, 마지막 눈맞춤도 하고 그렇게 보내주는 것이 더 나을 것이었다.
 
 
나한테 큰 공간이 있었다면 제대로 된 보관소로 만들어서 유지 시켰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보관소가 내게는 없다. 무언가를 쌓아두고, 오래 보관 보존할만한 상황이 아니고, 내 성격상 그런 일을 잘하는 사람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내 그림이 그리는 족족 잘 팔리는 그림도 아니니, 그냥 좁은 공간에 쌓이고 쌓였던 것이다.
 
 
내가 엄청난 이름의 대가라면, 이런 작품들조차 값이 매겨지고 대단하게 보관이 되었겠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Salvator Mundi는 처음 발견되었을 때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이 심각한 상태였지만 섬세한 복원 작업 끝에 고이 모셔져서 약 오천억원에 팔렸다.) 현재의 나는 모든 그림을 그토록 소중히 간직하고 집 한켠에 모셔두고 싶을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없다. 과거의 기록을 유지하는데 공간을 쓰는 것보다는, 새로운 공기를 들여오는 데 공간을 열어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신기한 것은 이 허전함 뒤로 들어오는 감정이다. 그것의 이름은 ‘홀가분함’이었다.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이고 지고 온 것들이 생각보다 무거운 짐이 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것 같다. 과거의 영광이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 셈이랄까. 버리면 버릴 수록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어 내심 좋았다.
 
 
내 인생의 전반전은 ‘재고쌓기’였던 것 같다.
이것 저것 만들어봤는데 팔리지는 않았다. (팔 능력도 부족했다. 세상에 나를 내놓고 알리는 법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돈만 몽땅 쓰고 끝난 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림이든, 사업이든 성공하는 케이스보다 망하는 케이스가 더 많은 법이다. 숱하게 낭비하고 많은 것들이 버려진 끝에 결국 배우게 되는 것들도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방식이 나한테 조금 더 어울리는지 그렇게 감을 잡아나간다. 아직 정답이랄 것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말 그대로 조금씩 감을 잡아나가고 있다. 조금 느릿하지만, 이번엔 서두르지 않고 한발 한발 다가가고 싶다.
 
 
이번에 이 과정을 통해 느꼈던 것은 더이상 물리적인 재료와 공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 내게 그닥 잘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다. 설령 다시 공간이 필요한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캔버스가 아닌 다른 것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태가 변하더라도 근본적인 부분은 변화가 없을 것이다. 난 여전히 꿈을 꾸고 상상하고 싶은 사람이다. 예전과 조금 달라진 것이라면, 내 창작물이 혼자 만족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것이 아날로그 페인팅이 될지, 디지털 아트가 될지, 아니면 그냥 책 한권이 될지, 가능성은 낮지만 노래가 될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문을 크게 열어두고 다양한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두고 싶다. 그러기 위해 애써 창고 정리를 한 것이다. 다시 채우고 싶어서 비운다. 크게 비우고 싶다. 다시 텅 빈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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